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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보는 경제] #누구나 아는 뻔한(?) 부동산 이야기 - 붕괴는 시작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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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보는 경제 : 부동산 이야기 Cover 디자인

 

# 포스팅 내용이 정보 위주, 자료 위주(검색만 해봐도 수많은 내용이 나온다)로 가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했다. 부동산에 대한 주제는 답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경제현상이다. 따라서 이는 가장 크게 선택의 문제이고 어떠한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결과도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가볍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데 얼마나 잘 될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나에게 있었던 일, 동기 등을 이야기할 것이고, 주로 현재 보다는 초점을 미래의 시점으로 맞춰 이런저런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답을 찾는 문제라기 보단 선택의 문제이므로 맞다, 틀리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당장 부동산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라는 문제라면 어려운 판단이 아니다. 어차피 살 능력이 있으면 사는 것이고, 없으면 구경만 하면 되는 것이고, 비싼 것은 비싼 만큼 그 가치가 있으므로 그 값을 치르는 것이다. 이것이 시장의 논리이다. 게다가 비싸다고 해도 쉽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부동산이 폭락해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팔지 않고 상속을 하던 증여를 하던 임대를 하던 선택을 하면 되는 사람들이다. 기본은 간단한데 이를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변수들이 많아질 뿐인 것이고, 구입할 수 있는 능력보다 은행에 돈을 빌려서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가 될 뿐이다.

누구나 미래에 오를 것 같은 주택을 구입하고 싶은 것(살기 좋은 집을 구입한다는 것은 명분일 뿐이다. 살기 좋은 집은 널려있는데 원하는 지역과 원하는 지역의 주택이 비싸서 그런 것이다)인데 한쪽에선 투자라 하고 한쪽에선 투기라 한다. 여기서 또 디테일하게 접근하면 집 한채 마련했는데 무슨 투기냐? 집 두 채 이상인 사람이 집을 사야 투기지. 이러한 논리가 팽배해진다.

이제는 부동산과는 상관없는 이념이 개입된다. 집을 사고 파는 경제행위를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집을 한 채가지고 있던 여러 채를 가지고 있던 투자가 되는 것이고, 정당한 자본의 투자행위로써 이득을 취하는 경제활동인 것이다. 다만 이를 공공의 개념으로 볼 때는 집도 없는 사람도 많은데 여러 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이고 여기서 취득하는 소득은 불로소득으로 규정하고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노동의 가치는 몸빵에서만 나온다는 좁은 의미로 한정하고 자본의 투자가치는 무조건 불로소득이라고 보는 것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그래서 공공의 개념에선 기업가들은 자본을 가지고 투자하며 자기는 몸빵으로 일하지 않고 대신 사람을 고용해서 일을 시킴으로써 소득을 취하므로 불로소득으로 간주한다는 논리도 성립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노동자는 자본의 노예가 된다는 역설을 펼침으로써 기업가와 대립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노예제도뿐만 아니라 산업혁명 시기에는 노예처럼 부려먹은 게 사실이다. 

이를 다른 경제활동에 적용해보자. 무인점포를 운영하는 점주는 과연 무인점포에서 얻는 수익이 불로소득일까? 그는 사람을 고용하는 대신 기기에 자본을 투자했다. 무인점포를 10곳을 운영하는 점주나 부동산 10채를 구입한 임대사업을 하는 사업주나 자본을 투자한 점에서 동일하다. '무노동 무임금'을 벗어난 '무노동 유소득'이다. 이를 달리 봐야 하는가?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틀에 박혀서 기업의 투자받는 방식인 주식 투자에 대한 수익도 투기로 치부하는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사회는 플랫폼이 없이는 살아남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즉 '무노동 유소득'의 흐름으로 바뀔 것인데 이를 다 불로소득으로 간주해야 할까? 여하튼 이념적인 이야기는 쓸모없는 논쟁이다. 내 관점은 각각의 개인이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느냐는 오로지 그 개인만의 선택이고 가치관이므로  서로 가지고 있는 관점을 공유하고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서로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나는 부동산 호구다 

늘 내집마련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많다.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는 개인적으로 많은 의문점을 갖게 된다. 보통 경제뉴스의 카테고리 안에서 '부동산'은 많은 이슈를 만들어냈고, 앞으로도 많이 만들어 낼 것 같다. 최근에는 주식 및 비트코인까지 떠들썩 거린다. 전혀 다른 분야 및 종목임에도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이는 비정상적이고 현실과 괴리감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쪽으로 많은 투자가 일어나고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많은 뉴스를 양산해 낸다. 

포스팅한 것에서 이야기 했듯 작년 11월부터 열심히 쉬고 있다. 벌써 2달을 쉬고도 보름이 더 지나갔다.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쉬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무엇을 해 먹고 살아갈지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평생직장 및 평생직업이 사라져 가는 판에 살기 위해서는 배우는 방법밖에 없다. 이제껏 하고 싶은 것 참고 일만 열심히 하고 살았는데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행복하게 생활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았던 것일까? 중간중간 쉬면서도 항상 괴롭혔던 문제였지만 여전히 답을 찾는 게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눈 앞에 닥친 현실 때문에 하나를 얻기 위해서 하나를 포기해야 해서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은 내 삶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쉬고 있다. 부동산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사회초년생일 때부터 였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 자체를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 중국에서 잠시 유학생활을 하다 돌아와 보니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유학비용은 집에 부담이 많이 되고 가뜩이나 없는 살림 거덜낼 수는 없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왔다. 어정쩡하게 공부하다가 오니 사회생활의 시작도 어정쩡한 모양새가 되었다.

당시에 나이제한이 있어서 아무리 쑤셔 넣어도 서류전형에서 우선순위로 제거되고, 유학도 마친 것이 아니라서 대학교 졸업장 하나만으로 나이 제한에 걸리는 상황에 할 수 있는 선택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애초에 사회에 대한 적응력이 없는 호구 상태였다.

이때 스트레스로 인하여 69킬로의 몸무게는 80킬로가 넘어설 정도로 높이뛰기를 하며 내 배는 산으로 갔다. (이 이후로 몸무게가 내려가지 않고 술살과 나잇살이 더해지는 불편한 과정을 겪게 된다.) 그래도 기회는 온다고 했는가? 선택지가 두 군데였는데 한 군데는 서울이었고 또 다른 한군데는 경기도 화성이었다. 수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서울은 집안 잔치 아니면 갈 일이 없어 후자를 택했다. 후회를 안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는데 이때는 지금 생각해도 후회가 좀 된다. 사촌 동생이 이야기해준 것인데 알바 형식이고 지금처럼 교통이 좋았던 때가 아니라서 강남역이 아니면 1시간 정도에 갈 수 있는 서울은 사당 정도(?) 였을 것이고 지리도 잘 몰랐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당시 사는 집이 오래된 단독주택이었다. 아니 오래 살았다. 고등학교부터 해서 십수 년간 살아왔고 사는데 지장은 없지만 겨울에 외풍이 정말 심했다. 이불속에서 입김을 불면 입김이 날 정도였으니... 바닥은 따뜻해도 공기는 차가워서 회사를 들어가게 되면 집부터 장만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전공은 경제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물 경제에는 그냥 깡통이었다. 

입사한 후에는 따뜻한 아파트로 이사할 생각에 시세를 알아봤더니 그냥 쌍욕부터 나왔다. 경기도라 서울만큼 비싼 것도 아니었는데 단독주택은 그야말로 똥값이었던 거다. 있는 거 다 팔고 지랄 염병을 떨어도 별 좋지도 않고 20평대 아파트 반 가격도 안 되는 거였다. 그야말로 대책 없는 부동산 호구의 시작인 거였다. 이제 막 시작하는 사회초년생이 대책이 없는 게 당연하다고 하지만 사회에선 당연한 것은 없다. 불리하면 불리한 채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호구를 면하기 위해 열공을 시작했다(?).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하루 세끼를 회사에서 먹어야 했다. 통근버스가 6시에 수원역에서 출발했고 입사한 후 일주일만 5시 30분에 퇴근시켜줬고 그 이후는 강제로 9시까지 근무였다.(야근 수당은 7시까지만 해당됨) 집에 도착하면 거의 밤 11시고 씻고 나면 자야 했으니 생활은 회사에서 하고 집은 기숙사였다. 하루에도 업무회의 2~3번은 기본인데 회의가 금방 끝나지도 않는다. 앉아서 있는 시간에는 대부분 보고서 작성에 협력사 전화에 피드백에 도통 인터넷 자체를 볼 시간도 없었다. 뻑하면 중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내려가서 통역하고 조치를 취해야 했고 그 왔다 갔다 하면 1시간은 우습게 사라졌다.

결국 이때는 부동산에 대한 열공은 그냥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 부동산 호구는 탈출했는가?

부동산 호구 탈출이 어디 쉬운가? 지금도 부동산 호구다. 호구를 탈출하고 괜찮은 아파트에 부모님 모시고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욕심은 없다. 정말로 전혀 없다. 아파트 살 돈이 있다면 절대로 아파트를 살 생각 안 할 것이므로...

다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다니던 첫 직장은 반년이 지난 후에 내발로 나왔다. '낙오자'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그것도 못 버티고 나오다니. 그런데 지금의 맷집으로 들어가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나에게 있어 최대의 멘붕은 이 회사였던 거였다. 사회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 첫 입사한 회사는 처음부터 유격훈련처럼 정신수련을 힘들게 시켰다. 특히 영화 속의 대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고 회의는 전쟁터였다. 말 한마디 잘못하고 회의록에 사인하면 그 책임을 면할 방법이 없다. 이때부터 나는 '꼴통'이 되었다. 

부서 간의 '책임을 미루는 전쟁'인데 맨 정신으로 다가갔다간 밥이 되기 쉽다. 그리고 내 자리에 앉으면 팀장은 늘 묻는다. "차는 언제 살 거야?" 일주일에 3~4일을 차를 사라고 강요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라. 이러다 미치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거다. 당시 동료 직원이 버스 타는 정류장까지 차를 태워줘서 사려다가 일부러 사질 않았다. 정말 '아반떼' 구입하려고 했다가 하도 차를 사라고 압박을 넣으니 오기가 생겨서 산다고 하면서도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5개월 정도를 그 '차를 구입하는 건'으로 계속 갈굼을 당했다.

아무리 멍청해도 2~3개월 정도 되면 일도 사람도 파악은 된다. 확실히 내가 적응을 못해서 인지 4개월째부터는 편두통이 심하게 왔다. 회사의 정문만 보면 두통이 시작되었고 그 정문이 등 뒤에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정말이지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편두통으로 죽을 리는 없겠지만 회사에 있는 동안 온종일 송곳으로 왼쪽 머리를 쑤시는 것 같았다.

여하튼 그러던 어느 날 상사가 꼬투리를 잡는 느낌이 들었다. 불합리한 질문을 하면서 답변을 요구했는데 여기에 나도 지지 않고 따지다가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참기도 싫고 정나미도 떨어져서 있는 힘껏 대들었다. 그날 이후로 출근을 하지 않았고 일주일이 돼서야 사직서 쓰기 위해 출근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여기서의 맷집은 다른 회사에서 아주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맘때 알게 된 사람이 이모부 친구이자 아버지 고향 후배였는데 오산에서 부동산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제 제대로 부동산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인가? 직원으로 근무를 하긴 했는데 월급도 받은 적이 없이 2달 정도? 일한 것 같다. 게다가 전 회사에서 받은 월급을 모았던 돈도 빌려줬다가 떼 먹혔었다. 나뿐 아니라 피해자가 여럿 있었고 어디로 튀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 이체한 내역을 토대로 형사소송 걸어서 원금은 받아내긴 했다.)

사무실은 지금의 오산 세교 택지지구가 개발되려고 할 무렵이라 땅만 있는 동네에 위치했다. 일 하러 왔지만 너무 할 일이 없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전 회사와 극과 극인 셈이었다. 사무실에 이사님 한 분 같이 있었는데 친척이었고. 대부분 시간을 오전부터 오후까지 멍하니 있자니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분도 알아서 온 것이 아니라 은퇴한 후 그냥 사무실 지킴이로 있었던 것이다. 지킴이 두 명은 열심히 사무실을 지킬뿐. 일을 알려달라고 말하려 해도 사무실에 안 들어오는 날이 다반사고 혼자 있는 날도 꽤 되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으로 부동산에 관련된 기사를 미친 듯이 읽었다. 

두어 달 후에 집에서 쉬게 되었을 때도 오로지 부동산 관련 기사만 골라서 읽었다. 무슨 말인지 어디 지역인지 몰라도 그냥 읽었다. 내용이 눈에 들어올 때쯤엔 정말이지 헤드라인 기사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단, 서울로 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서 경기 지역에 한해서 대부분 정보를 꿰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과녁만 사방에 즐비하면 무엇하는가? 집이 똥값인데... 아무리 오래 살고 정든 집이어도 가치는 똥값이니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는 한 단독주택 탈출은 어려웠다. 그런데 이 운빨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손잡고 온 것이다.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될 수도 있었고 조합원 도장도 찍었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수원분당선이 연결된 매교역 건설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당시 집에서 매교역 까지 뛰면 1분(?) 정도 되니 이는 곧 호재로 작용했다. 

재개발은 아무리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짧게 잡아도 3년 이상은 무조건 걸리고 5년 이상을 바라봐야 했는데 나의 눈은 용인에 꽂혀있었다. 용인의 성복동, 상현동에 포커스를 맞추고 계획을 짰다. 여기서 가장 아킬레스 건은 백수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무모했을지 몰라도 이때가 기회다 싶어 어떻게든 돈을 벌 테니까 대출받아서라도 이사 가자고 이때 아니면 아파트 못 산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리고 우리 집을 살 고객은 서울 사람이었다. 애초에 수원에 사는 사람에게 판다는 생각은 기대하지 않았다. 

내 계산이라면 서울 사람이 지방에 투자하는 것을 보면 역세권의 효과를 아니까 바로 지를 것이라 생각했고, 수원은 당시 수원역이 종점 하나밖에 없으니 역세권이라는 효과를 거의 알 수가 없었던 시기였고, 재개발에 대해서도 크게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던 때라 거래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 뻔했다. 매도 계약서는 썼고 계획대로 어머니와 함께 자금계획을 세웠다. 이때 내가 본 것은 미분양된 아파트에서도 '자이 브랜드'를 선택했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아... 그때 생각하면 또 열불이 나려고 한다. - 내용이 너무 길어져서 다음 포스팅에 이어서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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